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 알짜인 희성피엠텍 매각을 타진하는 것은 큰 틀에서 그룹사 정리에 속도를 내기 위한 움직임으로 풀이된다. 구본능 회장은 본인 대에서 그룹사를 순차적으로 정리할 방침이다. LG가(家)는 장자 승계 전통을 잇고 있는데 구본능 회장에게는 딸인 구연서 씨뿐이며 그룹사 승계 의사가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실제 구본능 회장은 2017년부터 막냇동생인 구본식 LT그룹 회장에게 LT정밀(옛 희성정밀), LT메탈(옛 희성금속), LT삼보(옛 삼보이엔씨), LT소재(옛 희성소재) 등 계열사를 잇달아 매각했다. 세간에서는 형제간 계열 분리 정도로 해석했지만 유일한 아들인 구광모 회장을 양자로 보내며 본인 대에서 사업을 정리하겠다는 뜻을 세웠다는 게 유력한 해석이다. 1949년생인 구본능 회장은 올해 76세로 고령이기도 하다.
11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희성피엠텍 지분 80.1%는 희성촉매가 보유 중이고 잔여 지분인 19.9%는 현대차가 갖고 있다. 현대차는 희성피엠텍 주인이 바뀌더라도, 남은 지분을 동반 매각하지 않고 소수주주로 남을 계획이다. 희성피엠텍 매각을 위해서는 현대차의 동의가 필요한데 특별한 반대는 없다는 얘기다.
업계에서는 이번 정리 과정에서 과거 희성정밀과 희성금속, 희성소재 등을 정리했듯이 LT·LX 그룹 등 범LG가에 넘기는 것을 우선 고려하되, 차선책으로 사모펀드(PEF) 등 외부 매각도 염두에 둔 것으로 보고 있다. 구본능 회장 입장에서는 동생인 구본식 회장에게 매각하는 것이 사업의 안정성과 영속성 측면에서 낫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IB 업계 관계자는 “이미 수년 전부터 구본능 회장은 계열사를 매각하는 등 그룹을 정리하는 과정을 밟고 있다”면서 “알짜 계열사는 우선 범LG가에 넘기는 방안이 유력하나, 다양한 가능성을 고려해 외부 매각을 위한 초기 작업도 동시에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희성피엠텍은 2004년 미국 엥겔하드그룹 계열사인 희성엥겔하드와 일본 NECC(N.E. Chemcat Corporation), 현대차 합작사로 설립됐다. 당시 자본금 60억 원에 경기 안산에서 가동을 시작했다. 2010년 NECC가 철수했고 희성촉매가 NECC 지분 전량을 사들여 희성그룹에 편입됐다. 2011년 충남 당진에 신공장을 세워 현재까지 가동 중이다.
희성피엠텍은 국내 유일의 백금계 귀금속 회수 및 정제회사다. 구체적으로 자동차 및 석유화학 폐촉매, 귀금속 스크랩을 사들인 후 정제 공정을 거쳐 백금·팔라듐·로듐 등 백금계 귀금속을 뽑아낸다. 백금과 로듐의 경우 국내 수출 물량의 95%를 차지할 정도로 시장 지배력이 높다. 미국·영국·일본·홍콩 등 전 세계 주요국으로 수출되고 있다. 희성피엠텍 당진공장은 연간 백금 4톤, 팔라듐 6톤, 로듐 1톤 등을 생산한다. 매출의 70% 이상은 모회사인 희성촉매에서 발생한다. 희성촉매는 백금계 귀금속을 원재료로 자동차 매연 저감 및 화학 환경 촉매를 제조해 완성차 업체 등에 공급한다.
희성피엠텍 실적은 국제 귀금속 시세와 경기 흐름에 밀접하게 연동된다. 2022년 희성피엠텍은 매출 1조 4370억 원, 영업이익 730억 원으로 창사 이래 최고 실적을 구가했다. 희성피엠텍이 판매하는 팔라듐, 로듐, 백금은 코로나19 이후 완성차 판매 증가, 2022년에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급은 부족한데 수요가 급증하는 현상이 겹치며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로듐은 2021년 공급 차질에 온스당 2만 9800달러로 사상 최고가 기록을, 백금도 온스당 1300달러로 6년 사이 최고가를 찍었다. 팔라듐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급 차질이 빚어지며 2022년 온스당 3440달러를 찍어 사상 최고가에 거래됐다. 이후 공급이 안정되며 이들 금속 가격은 모두 우하향했다. 업계 관계자는 “올해는 전년 대비 수주 실적이 양호한 편으로 실적 반등 가능성을 높게 본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희성피엠텍 매각이 친부인 구본능 회장이 상속 분쟁 중인 구광모 회장을 측면 지원하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고(故) 구본무 LG그룹 회장의 양자로 입적한 구광모 회장은 구연경 LG복지재단 대표 등 세 모녀(김영식 여사, 구연수 씨)와 상속재산을 두고 민사소송 중이다. 이르면 올해 1심 소송 결과가 나올 가능성이 거론된다. 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구광모 회장은 현재 3000억 원가량의 주식담보대출을 받고 있어 자금 여력이 빠듯한 상황”이라며 “매각 후 배당 등을 통해 수백억 원 이상의 현금을 확보할 길을 터줄 수 있다”고 말했다.
희성촉매 지분은 독일 화학업체 바스프(BASF)가 50%를 가지고 있고 나머지는 희성전자(37.99%), 구본능 회장(6.45%), 구광모 회장(5.56%)이 보유하고 있다. 구본능 회장이 2017년 계열 분리를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챙겼던 알짜 회사가 희성촉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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