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에서 보면 이렇게 생겼고 위에서 보면 이런 느낌일 거야. 그런데 왜 이걸 평면에 그려야 하는 것일까.”
많은 디자인 전공생들이 입체물 스케치를 할 때마다 들 수 밖에 없는 생각이다. 입체물 스케치는 ‘노동 집약적’ 작업이다. 하나의 입체물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매번 평면의 종이 위에 정면·측면·윗면·아랫면을 각도를 조금씩 바꿔가며 수백 장 그려내야 한다. 스케치를 하는 사람과 실물과 같은 형태로 3차원 모델링을 하는 전문가가 다른 사람이라는 점도 일을 더 어렵게 만든다. 소통을 통해 간극을 좁혀야 하기 때문이다. 카이스트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하던 스케치소프트의 김용관 대표도 산업디자인을 연구하던 대학원 시절 내내 이 문제로 고군분투해야 했다.
“우리는 수백 년 동안 눈 앞에 보이는 입체를 평면으로 바꾸는 법을 배워왔습니다. 소실점·투시도·원근법 등은 다 실물을 2차원으로 만들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질문이 생기더라고요. ‘그냥 본 대로 그릴 수는 없는 걸까.’”
이 질문이 시작이었다. 3차원(3D)으로 쉽게 드로잉을 할 수 있는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2020년 스케치소프트 창업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지난 달 김 대표는 미국 실리콘밸리 쿠퍼티노의 애플 본사에서 진행된 애플 연례 개발자회의(WWDC) 2025 무대에 올랐다. 그가 만든 3D 드로잉 앱 ‘페더(Feather)’는 애플의 디자인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됐다. 아이패드 전용 앱인 이 앱은 현재 아이패드 유료 앱 다운로드수 기준 글로벌 2위를 기록 중이다.
◇하나의 선이 입체로…직관성의 힘=페더는 세계에서 유일한 3D 드로잉 앱이다. 한 줄의 선만으로 입체물을 그릴 수 있는 직관적인 이용 방법이 특징이다.
“선을 하나 그으면 그게 3차원의 기준선이 되고 거기에 다른 선을 그리면 면이 되고 다시 여러 선을 얹어 입체물 스케치를 완성하는 겁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실제 페더 앱을 이용해 나비를 그렸다. 보통 사람들은 평면상에 날개를 펼친 나비를 그리지만 그는 나비의 옆모습부터 선 하나로 그려 기준선을 만든 뒤 위에 날개 형태를 덧대 입체적 형태를 완성했다.
기존 3D 모델링은 3차원 공간 상의 계산된 수치나 좌표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입체물 스케치를 만든다. 이 과정에서 창작자는 아이디어를 3차원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모델링 전문가에게 모델링 작업을 위탁한다. 밑그림을 그리는 이와 모델링을 하는 이가 다르다 보니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발생한다. 페더는 이 간극을 없앴다. 김 대표는 “단순한 낙서만으로 입체를 완성할 수 있다”며 "원래 창작자의 의도가 그대로 구현될 수 있는 게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페더의 또 다른 강점은 언어적·문화적 장벽이 없다는 점이다. 스케치는 어디서나 통하는 공통의 언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현재 페더 이용자는 6만 명 정도인데 이 중 4분의 1이 북미에서 이용하고 있다”며 “상당수가 글로벌 이용자”라고 말했다. 특히 김 대표가 인상 깊게 본 것은 3D 드로잉을 접하는 아이들의 반응이었다. 어린 아이일수록 소실점·투시도 등 2차원적인 사고 방식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이 앱을 직관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그는 설명했다. “고정관념 없는 어린이들이 오히려 더 쉽게 잘 사용해요. 기존의 2D 표현 방식에 익숙한 성인보다 더 직관적으로 입체를 이해하고 표현합니다.”
이 같은 직관성은 글로벌 경쟁 앱들이 넘지 못한 진입 장벽이다. 3D 스케치 툴을 만들기 위해 지금까지 수많은 기업이 도전했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낸 툴은 대부분 특별한 교육 없이는 사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김 대표는 “기존 도구들은 이용하려면 고난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창작자가 처음부터 좌절을 겪게 만든다”고 말했다. 소프트스케치의 팀원 12명 중 홍익대 미대 전공생이 4명, 카이스트 산업디자인 전공생이 3명이다. 관련 학과 전공자가 절반이 넘는 셈이다. 이들은 모두 입체물 스케치를 구현하는 데 열성이라 사무실에는 낙엽, 동물 뼈 등 다양하게 수집한 입체들이 가득했다.
◇챗GPT 시대에 드로잉은 소통 도구=챗GPT 같은 생성형 인공지능(AI) 서비스가 마음껏 그림도 그려주고 3D 입체물도 만들어주는 시대다. 사람이 직접 3D 드로잉을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 대표는 더욱 정교한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의 드로잉을 통한 소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페더는 ‘이렇게 생겼으면 좋겠어’라고 AI에게 효과적으로 말하기 위한 소통하는 도구이자 일종의 ‘프롬프팅’ 방식”이라며 “말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아이디어를 3D 드로잉으로는 정확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품질의 콘셉트 아트를 생성형 AI가 제작해줄 수 있지만 가장 앞단의 ‘상상’을 시각적으로 풀어내는 도구는 여전히 사람이 쥐고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페더는 그 앞단에 위치한 ‘스케치의 영역’을 지키는 도구다.
현재 페더는 건축 분야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용되고 있다. 내부 구조나 공간 구성을 직관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 건축사무소와 설계사들이 먼저 도입했다. 이어 애니메이션·일러스트 등으로 이용 분야가 확장되고 있다. 프랑스의 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는 복잡한 배경 콘티 작업에 페더를 전격 도입했다. 장기적으로는 영화·웹툰 등의 영역으로 확장될 여지도 충분하다.
김 대표는 창작의 본질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예전에는 좋은 그림을 그리는 게 중요했지만, 지금은 생각을 얼마나 잘 전달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죠.” 그래서 그는 페더를 ‘소통의 도구’라 부른다.
이런 비전은 제품 외에 서비스로도 이어진다. 현재 스케치소프트는 기업 고객을 상대로 하는 협업 기능이 강화된 서비스를 맞춤형으로 개발하고 있다. 건축 부문에서는 스케일 비례 적용, 애니메이션 분야에서는 카메라 워크 시뮬레이션이 가능하다. 증강현실(AR) 서비스를 결합해 드로잉을 현실 공간에서 하는 테스트도 진행 중이다.
◇경쟁 상대는 종이…입체 구현 방식 바꿀 것=“우리는 종이와 경쟁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여전히 상상을 시각화할 때 종이와 연필을 먼저 찾는다. 그의 목표는 이 습관을 바꾸는 것이다. 그는 페더가 종이보다 더 익숙한 도구가 되는 날, 창작 방식 자체가 바뀌게 될 것이라고 자신감을 내비쳤다. 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이용자가 한 번 다운로드할 때만 2만 2000원(북미 시장에서는 15달러)의 정액 요금을 내도록 하는 전략을 취했다. 그는 “일단은 많은 이들이 접하게 하고 추가적인 수익화 방안을 모색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페더 갤러리’ 기능도 오픈했다. 유저들이 자신의 드로잉을 공유하고, 피드백을 받고 이를 바탕으로 소통한다. 이 갤러리를 기반으로 향후 AI 학습 데이터 확보와 콘텐츠 마켓플레이스로의 확장도 구상 중이다.
“창작자의 손 끝에서 시작해,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전체 흐름을 설계 중입니다. 우리는 이제 본 것을 본 대로 그릴 수 있는 시대를 만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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